유독 순자산 10억원이 무시받는 이유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10억이 ‘작은 돈’이 되었다.
물론 진짜 작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언론 기사 한 귀퉁이에서도, 부동산 카페 댓글에서도, 심지어는 지하철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도 "10억 가지고 뭘 하냐"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런데 정작 통계청 자료를 들여다보면, 순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가구는 전체의 10% 남짓에 불과하다. 90%는 거기 못 미친다는 뜻이다.
즉, 여전히 10억은 한국에서 ‘상위층’의 상징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별것 아닌 돈’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단순한 인플레이션의 문제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물가가 오르고, 자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예전보다 돈의 체감 가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서열화된 욕망 구조’에 있다. 한국 사회는 본질적으로 수직적인 욕망 체계를 갖고 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방식이 ‘절대 기준’이 아니라 ‘상대 위치’라는 말이다.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보다, 내가 남보다 얼마나 더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 상대적 위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진 것도 과소평가해야 한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진 자들 앞에서 자기 자산을 숨기고, 못 가진 자들은 애써 가진 자들의 자산을 무시하거나 폄하한다.
‘10억? 그거밖에 안 돼?’라는 말은 실은 ‘나는 그 위에 있다’는 선언이자, 욕망의 무기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것이 한국 특유의 ‘올려치기 문화’다.
우리는 무언가를 대단하게 만들어야 안심한다. 한강변 아파트는 30억이 넘어야 '가치 있는' 자산이 되고, 연봉 1억은 이제 ‘중간은 가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가격은 곧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허영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부동산, 교육, 결혼, 육아 모든 영역에서 ‘평균 이상’을 지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수치를 끌어올리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10억이라는 숫자는 사회적 맥락에서 점점 축소된다.
"요즘은 20억은 있어야지."라는 말 뒤에는 실은 ‘그래야 나는 안심이다’라는 말이 숨어 있다.
결국 이 올려치기의 문화는 상호 감시와 자기 부정의 결합물이다. 다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다들 불안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봐야 할 것은, 순자산 10억원을 모은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가정이 평균적인 소득을 꾸준히 벌고, 과도한 소비를 절제하며, 자산을 운용하고, 대출을 조심스럽게 감당하며, 시장의 사이클을 예의주시해도 즉, 그야말로 성실하게 ‘정석대로’ 살아도 10억이라는 자산을 형성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월급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깝고, 중소형 자영업도 위태롭다. 결국 투자, 그것도 어느 정도 운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운조차, 감당할 만한 리스크를 기꺼이 짊어진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이는 매우 긴 호흡과 고도의 판단, 그리고 수많은 실패의 경험을 견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다.
말하자면, 10억원의 순자산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축적된 시간과 통찰, 인내의 총합이다. 그것이 결코 ‘가벼운 돈’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10억원의 무게를 너무 쉽게 가벼이 여기는 순간, 사실은 그 금액을 만들어낸 수고와 현실을 함께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돈의 가치만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삶 자체를 경시하는 태도다. 10억이 작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10억을 모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또는 10억을 이미 가진 이들이, 그 이상의 세계를 들이밀며 계속해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불안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심리적 프레임에 스스로가 휘말려 있는 것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