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이스털린이라는 경제학자가 있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그는 30년간 소득과 행복을 추적한 '행복경제학'의 거목. 그의 '지적 행복론'이라는 책은 양서이므로 교양적 차원에서라도 필독해두면 좋을 것이다.
올해 97세인 그를 조선비즈에서 인터뷰했는데 내용이 좋고 여러군데 곱씹을 대목이 있다.
여러분이 재테크하는 이유도 행복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쾌락을 얼마간 희생해서라도 절제와 소비 지출 통제를 하는 삶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그는 판단케 해준다.
결과적으로 그는 연소득이 1억원에 근접할 경우 그 이상 소득이 늘어나는 것으로는 삶의 실질적 행복에 기여하진 못한다고 말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에 집중하는 단계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수용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른 것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재테크하는 것이 행복을 위해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잊는 순간 재테크하는 행위 자체가 주인을 삼켜버린다. 돈으로 돈을 버는 삶에 지나치게 몰두해 다른 중요한 가치들, 이를 테면 사랑하는 가족, 자식들과의 관계, 내면의 자유가 훼손된다. 돈은 이 모든 것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지만 수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이스털린의 인터뷰 주요 멘트만 발췌했으니 정독 바란다.
1.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자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죠. 돈이 많으면 정말 더 행복해지는 걸까? 오랜 시간 공들여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체계화된 설문조사로 두 가지 데이터를 모았어요. 한 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시계열 데이터'와 동시대의 국가들을 서로 비교하는 '횡단면 데이터'를 수집해서 분석했지요.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른 다음에는 더 이상 행복이 커지지 않는다'는 그래프가 완성됐어요. 이른바 '이스털린의 역설'이죠.
2.
소득이 낮은 경우에는 소득이 늘면 행복도 증가합니다. GNP가 낮은 저소득국가보다 선진국이 더 행복 수준이 높고, 한 국가 내에서도 소득이 낮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행복 수준이 높았어요.
하지만, 연 소득이 7만 5천 달러를 초과하면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아요. 소득이 임계치에 이르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받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소득이 증가하면 더 풍족해지는 것은 맞지만, 평균적으로 아무도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모순을 만나게 됩니다.
3.
실제로 미국은 70년 동안 실질 소득이 3배 증가했지만, 행복 수준의 장기적 추세는 변동이 없거나 하락세입니다. 행복과 소득은 단기적으로는 함께 움직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4.
핵심은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남보다 많이 버느냐'죠. 실제로 제가 가르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졸업 후 연봉 선택 실험을 했습니다.
A 10만 달러를 번다(동기들은 20만 달러를 번다).
B 5만 달러를 번다(동기들은 2만 5천 달러를 번다).
제자 중 2/3가 B를 선택했어요. 절대적인 금액이 적더라도 내 소득이 친구의 소득보다 더 많은 상황을 선호했지요. 상황을 판단할 때 마음으로 정하는 준거 기준은 대부분 사회적 비교, 타인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설정됩니다. 내 소득이 증가할 때 내 준거 기준 즉 타인의 소득도 증가하기 때문에 소득 증가가 행복에 미치는 순효과는 미미해지는 거죠.
5.
행복하기 위해 돈을 좇는 무의미한 경쟁이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요. 그러나 이 역설은 지금까지도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적 행복론'을 쓴 이유예요.
6.
소득이 증가할수록 이미 갖고 있는 것만큼 갖고 싶은 것의 목록도 계속 증가하죠. 주택, 고가의 가구, 자동차, 여행 등등. 랠프 월도 에머슨이 그랬어요. "욕구는 자라나는 거인과 같아서 그가 입은 외투가 자신을 덮을 만큼 컸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이 적을수록 행복의 수준은 높아집니다.
7.
많은 사람이 필요 이상의 큰 집과 자동차를 사고 큰 빚에 시달립니다. 노후에는 필요한 것들도 줄어들고 물질적 욕구도 감소하죠. 대출금과 그 밖의 빚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 행복 수준도 올라갑니다.
교훈은 뭘까요? 주변을 따라가지 말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불필요한 빚을 만들지 않으면, 행복감이 올라가요. 언젠가 저도 축구 코치의 집에 놀러 가서는 저택의 웅장함에 놀라 돌아오는 길에 의기소침해졌어요. 하지만 곧 깨달았죠. 축구 코치의 집이 아니라 좋아하는 축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8.
어른의 행복은 대체로 경제 상황, 가정생활, 건강이라는 세 가지 조건에 달려 있어요. 행복 수준을 높이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은 돈 대신 시간을 활용하는 겁니다.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죠.
돈 버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건강이나 가정생활에 시간을 쓰면 행복 증진 효과가 매우 뚜렷합니다. 많은 사람이 경제 상황은 서로를 비교하지만, 건강과 가정생활은 그 자신의 히스토리 안에서 과거와 비교하거든요.
9.
건강은 비교로 선순환이 일어나는 구조입니다. 소득이 제로섬게임이라면, 건강은 윈윈 패턴이죠. 모두가 소득에 올인하면 아무도 예전보다 더 행복해지지 않지만, 모두가 건강에 힘쓰면 다 함께 더 행복해져요. 건강의 준거 기준은 타인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좋았거나 나빴던 시절)입니다. 타인의 건강 정보는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물론 노화라는 변수가 있지만, 그건 매우 느리고 대체로 공평하게 진행됩니다. 당장 산책을 시작하고 건강하게 먹고 정기적으로 의사를 찾는다면 우리는 어제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어요.

10.
함께 사는 파트너가 생기면 더 행복해집니다. 결혼 그 자체가 부가적인 효과를 내지는 않아요. 결혼 후 2년이 지나면 행복은 결혼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또한 자녀가 있다고 부모가 인생 전반에 더 행복해졌는지는 불확실해요. 남녀에 따라 다르고 가치관이나 재정 변화에 따라 행복 수준이 오르락내리락 변화했어요.
11.
혼자 사는 사람이 배우자와 사는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덜 행복하지만, 그 또한 혼자 살게 된 이유에 따라 달라져요. 만족도가 가장 낮은 사람은 별거 중인 사람입니다. 결혼 상태만 유지하면서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12.
일자리의 추세는 개인이 막을 수도 완벽하게 대비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국가 정책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스웨덴 국민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로봇으로 자동화되는 걸 걱정하지 않아요. 노동자는 생활비 지원을 받으면서 새로운 일을 얻기 위해 재교육을 받을 수 있거든요.
13.
낮은 행복 수준 그 자체가 자살의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어요. 자살률 증가에 유의미한 요인은 주류, 특히 증류주 소비량입니다. 이른바 보드카 벨트로 알려진 국가들이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에 반해 음주가 금지된 이슬람 국가들의 자살률은 낮지요.
14.
부탄의 국민총행복 지수는 높지 않습니다.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부탄의 국민총행복 지수는 154개국 중 100위에 가깝고, 이웃 나라인 네팔과 거의 같습니다.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15.
저는 처음부터 경제학이 인간의 행복에 관한 학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공공의 행복은 경제학의 궁극의 관심사였으니까요. 경제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은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행복과 경제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어요.
16.
파레토는 경제학은 행복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관한 학문이라고 주장했어요. 어찌 됐건 파레토 때문에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에서 일궈낸 도덕 철학의 한 분야에서, 관찰과 방정식이 가득한 데이터 집약적 현대 경제학으로 분화했습니다.
파레토 이후 경제학을 '선택의 학문'으로 보는 관점이 20세기를 지배했죠. 이때부터 경제학에서 행복은 1인당 공급되는 재화의 양으로 축소됐어요. 그러나 차츰 행복을 연구하는 저 같은 경제학자들이 늘어났고, 행복을 제대로 측정하기 시작했어요. 인간을 단순 행위자 혹은 생산 요소가 아니라 애덤 스미스처럼 감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비로소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쾌락을 진지하게 측정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17.
행동경제학과 행복경제학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는 데 공통점이 있어요.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열었지요.
차이는 두 가지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의사 결정의 과정을 분석하지만 행복경제학은 의사결정의 결과를 분석합니다. 예컨대 행동경제학자는 '자녀를 몇 명 낳을까?' 결정 방법을 탐구하지만, 행복경제학자는 '자녀가 있으면 더 행복한가'를 묻습니다.
전자는 의사 결정에 따른 효용, 후자는 경험의 효용 즉 실현된 만족도에 관심을 두는 거죠. 그래서 행동경제학자는 사회 심리 실험을 사용하고 행복경제학자는 사회 조사 데이터를 활용합니다.
18.
행복에 관한 생애 주기는 파도 모양입니다. 10대까지 상승하다 20대 초 중반에 바닥을 칩니다. 이후로 30대 중후반까지 서서히 상승하죠. 그러다 하락세로 접어들고 50대가 되면 다시 바닥을 쳐요. 마지막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면서 70대에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런 다음 세 번째로 하락세를 보이죠.
정리하면 평균적으로 10대, 30대 후반, 70대에 최고조를 보이지만, 20대, 50대, 80대 이후에는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이 패턴에는 경제 상황, 가정, 건강이라는 행복의 3가지 요소가 잘 녹아있어요. 20대 하락은 직장 때문에 생겨요. 20대에서 중년까지는 주로 가정생활이 행복을 좌우하죠. 60대에 이르면 은퇴로 행복 수준이 올라가고 노년의 황금기가 지나면 배우자 사망과 건강 악화로 다시 바닥을 칩니다.
19.
저는 행복이 바닥을 친다는 50대에 재혼하면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기를 맞았습니다.
20.
중년까지는 여성이 더 이후로는 남성이 더 행복해합니다.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일찍 결혼하고 평균 수명이 길고 노동 시장 참여율이 낮기 때문입니다.
젊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행복한 이유는 결혼할 가능성이 더 높아서예요. 남성은 직업과 결혼에서 더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에 행복도가 떨어지죠. 노년에는 여성의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향이 있어서 여성의 행복 수준이 감소합니다. 운 좋게 장수하는 남자들은 여전히 아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배우자를 잃은 여성보다 더 행복한 것이지요.
21.
경제학을 복지가 아니라 '선택의 과학'으로 보는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많아요. 이들의 연구는 사람들의 선택을 설명하는 것에서 멈춥니다. 저는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 실제로 원하는 결과를 불러왔는지를 오랜 기간 탐구했어요.
행복경제학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회적 비교의 결과를 보여주고, 행복가성비를 높이는 방법을 증거로 제공하기 때문이죠.
22.
GDP의 증가는 행복을 담보하지 않았어요. 산업 혁명은 개인의 물질적 삶을 개선했지만, 경제 성장 그 자체가 개인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증거는 없었어요. 오히려 자유시장경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행복에 중요한 바탕인 고용, 의료서비스 등이 불안정해졌고, 가정 생활의 긴장을 초래했죠.
23.
여러분보다 더 많이 살아온 노교수의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97세가 될 때까지 저는 수많은 데이터와 증거를 들이밀며 입증했어요. 부자가 된다고 더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정 생활과 건강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세요. 진심으로 '행복의 가성비'를 생각한다면, 돈 버는 데는 관심을 덜 가지는 게 좋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 혁명은 자연과학의 산물이고, 인구 혁명은 생명과학의 산물입니다. 행복 혁명은 조사 데이터를 활용한 사회과학의 산물이죠. 각각의 혁명은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성도 있어요. 여러분은 이 세 가지 혁명의 은혜로운 수혜자입니다.
일단 미래에 대해 너무 겁먹지 마세요. 비교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개인의 결정, 그리고 고용 복지가 잘 설계된 정부의 정책 결정이 행복 혁명을 끌어내리라 확신합니다.
출처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많이 번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아” 97세 美경제 석학의 일침 (naver.com)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
첨언하자면,
"많이 벌 수록 행복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전제는 그 벌이가 나를 위한 노동이냐, 나 아닌 조직이나 타인을 위한 노동이냐에 달려 있다. 나의 자산이 스스로 일하여 돈을 벌고 그것을 불리고 계속하여 일할 동안 나는 나의 소중한 시간을 오로지 나의 삶,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을 때 인생은 이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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