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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단상

오직 내 집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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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세입자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 사례부터 보자.

1.

11월 전세 만료를 앞둔 세입자 황모 씨(33)는 집주인이 "계약갱신청구권을 보장해주겠다"고 했지만 계약 갱신을 스스로 포기했다. 황 씨가 2년 전 임대차 계약을 맺을 당시 지불했던 보증금은 5억원 내외였다. 시세는 그동안 무섭게 올라 황 씨가 사는 아파트의 최근 전세 시세는 9억원을 넘었다. 황 씨는 전세를 포기하고 매매할 집을 구할 생각이다. 그는 "이번에 운좋게 계약 갱신을 한다 해도 2년 뒤엔 전셋값을 최소 5억~6억원은 올려줘야 할텐데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지금 전세 사는 집보다 조건이나 위치가 크게 떨어지더라도 집을 사 들어가는 게 안심이 될 것 같다"고 털어놨다.

2.

30대 공기업 직장인 강예솔 씨(34)는 4년 전만 해도 보증금 3억원에 직장 근처인 마포 인근에서 방 3개짜리 전용 59㎡ 신축 아파트에 살았지만 2년 뒤 좀 더 외곽인 구축 아파트로 밀려났다. 지금은 모텔촌이 밀집해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지 않는 지역 오피스텔에 전세를 구했다. 결국 경제력이 달리는 젊은층부터 서울 도심 아파트에서 외곽으로 밀려나거나 빌라 전세를 택하고 있는 셈이다. 당장 계약갱신권을 쓴다해도 2년 뒤는 더 막막하다.

3.

서울 금천구에서 2년째 전세를 살고 있는 신혼부부 박모 씨(35)는 최근 계약을 갱신했지만 보증금을 시세에 맞춰 기존 3억원에서 4억5000만원으로 올려줬다. 최근 아이를 낳아 이사를 가기 힘들어진 박 씨는 집주인 요구에 따라 전세금을 50% 올려줄 수 밖에 없었다. 박 씨는 "전세금을 올려주지 않으면 집주인이 직접 거주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임대차법으로 수혜를 본 세입자들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푸념했다.

한국경제가 소개한 황 씨와 강 씨 이야기는 소수의 사례가 아니다. 서울에 사는 무주택 직장인 다수가 겪는 고충이다. 1년 전 당정이 '세입자 주거 안정' 명분으로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한데 따른 파국적 말로. 세입자 주거는 외려 더 불안해졌고, 주거난민 벼락거지만 대거 양산됐다. 지금도 세입자들은 불안감에 밤잠 설치며 뒤채인다.

새롭게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세입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계약갱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존 세입자들마저 위기감이 커져 있다. 계약을 갱신한 세입자들도 전셋값 폭탄이 2년 유예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계약갱신이 만료되면 전셋값은 기본 수억원씩 뛸 것이고, 대비 없이는 외곽으로 내밀리고 만다.

전세 매물이 급멸하니 전셋값은 미칠 듯이 치솟고 있다. 부동산 분석업체 아실 집계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1만9841건이다. 1년 전(3만7174건)에 비해 47%가량 급감했다. 그 영향으로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KB국민은행 기준)은 1년 전 4억9922만원에서 6억3483만원으로 28.6% 급등했다. 기사가 소개한 두 아파트를 살펴보자.

4.

인기 있는 신축 대단지 아파트 중에는 전셋값이 1년 사이에도 10억원가량 급등한 곳도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222㎡는 지난달 35억~36억원에 전세 계약됐다. 임대차법 시행 초기인 지난해 9월만 해도 27억3000만원에 계약이 이뤄지던 아파트다.

5.

동작구 흑석동 '한강센트레빌' 전용 114㎡는 5월 14억원에 전세 거래됐다. 올 1월의 직전 거래(8억원)보다 2배 가까이 뛰었다. 용산구 서빙고동 '신동아' 전용 140㎡ 또한 지난달 15억원에 거래됐다. 3월의 전고가(12억원) 대비 3억원이 올랐다. 용산구 K공인 대표는 "단지 내 한 면적 아파트에 매물이 1~2개 있으면 다행일 정도로 물건이 없다. 집주인들이 직전 거래가 대비 전셋값을 1억원 이상씩 올리는 게 예사"라며 "월세로 전환하려는 움직임도 많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2년 뒤 계약갱신권이 한 차례 끝난 뒤 전셋값이 한 번에 두 배 이상 뛸 수 있다고. 그런데도 정부는 계약 갱신율이 57%에서 78%로 높아졌다고 자찬하니 미친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둘 다 일 것이다.

그리고 갱신율 78%는 사실과도 다르다. 이 숫자엔 세입자가 갱신권을 행사하지 않고 임대료를 5% 이상 올린 재계약도 포함된다. 전세 갱신(재계약) 비율이 78%였으나 실제 갱신권 행사 비율은 만기도래 계약 중 47%에 그쳤다. 갱신은 했으나 계약갱신청구권도, 전월세상한제도 쓰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것이다.

결국 새로 전세계약을 체결한 세입자, 계약을 갱신한 세입자 모두 전셋값 급등 피해를 보는 격이다. 명명백백한 규제의 역설. 선의로 포장된 사악한 정책이 다수 국민을 고통받게 하는 이 비극은 이제 겨우 전초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마음 단단히 잡으란 얘기다.

오직 내 집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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