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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에 대한 단상

이 미친 세상에서 당신이 부자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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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시국이 어지러울 때

나는 당신이 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을 필독해보길 권한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능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하루 하루 삶도 지금보다 더 윤택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핑거의 말처럼 비뚤어진 도덕의 안경을 쓰고 산다는 것은 피해자의 사고방식으로 산다는 것이고,

이는 곧 순수한 악의 신화에 물들어 스스로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자해행위에 다름 아니다.

포퓰리즘 선동가가 활개치는 이런 시국일 수록

핑거는 당신의 삶의 가장 귀중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확언한다.

아래는 곱씹어 볼 만한 핑거의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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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덕의 안경을 썼을 때 채택하는 사고방식은 피해자의 사고 방식이다. 악은 그저 피해를 입힐 요량으로 이유 없이 자행된 행위이고, 뼛속까지 사악한 악당이 자행하는 행위이고, 죄 없고 착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행위이다. 이것이 왜 신화일까? 사실 (심리의 안경을 꿰뚫어 볼 경우) 악은 대체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악의 신화는 진정한 악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좌절시킨다. 과학자의 관점은 가해자의 관점과 비슷하고 도덕주의자의 관점은 피해자의 관점과 비슷하기 때문에, 과학자는 '변명'을 찾거나 '피해자를 비난' 하는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아이히만에 대한 판단이 옳았는지는 둘째 치더라도(역사학자들은 그가 아렌트의 생각과는 달리 좀 더 단호한 이데올로기적 반유대주의자였다고 본다.), 아렌트는 순수한 악의 신화를 해체하는 데 예지를 발휘했다.

범주화의 문제는 이것이 종종 통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범주를 도덕화하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집단을 본질화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을 어떤 범주의 예시로 인식하는 습관은 갈등 상황에서 아주 위험해진다.

'나쁜 피'라는 본질주의적 개념은 요람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데서 생겨난 여러 생물학적 비유들 중 하나이다. 인간의 인지는 비유로 작동할 때가 많은지라, 자꾸 증식하는 성가신 존재라는 개념에서 쉽게 해충을 상기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생물학적 오염에 대한 방어 기제가 진화되어 있다. 바로 혐오감이다. 그런데 이 혐오감은 쉽게 도덕화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본질주의적 습관이 있어, 사람들을 범주로 나눠 뭉뚱그린다. 그리고 그 범주 전체에 도덕 감정을 적용한다. 이 조합 때문에, 개인이나 군대의 홉스식 경쟁이 집단 간 홉스식 경쟁으로 바뀔 수 있다.

솔제니친이 지적했듯이, 사람을 수백만명 죽일 때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개인을 도덕화된 범주에 가두는 유토피아적 신념이 강력한 체제에 뿌리 내리면, 그야말로 최대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넬슨 만델라와 데스몬드 투투는 우애를 뜻하는 코사 족의 개념인 우분투를 언급하며, 응보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의 체계를 구축했다.

사회는 원한을 일일이 갚으려 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위해에 일정한 선을 긋고, 대대적인 사면을 허락해야 한다. 명백한 주모자들과 일부 불량한 추모자들만을 고발해야 한다. 그들에 대한 처벌도 피의 복수가 아니라 평판, 체면, 특권에 타격을 입히는 형태여야 한다.

모든 성공적인 화해에서는 응보적 정의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성취하지도 않았다. 심란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사람들은 사면을 허락하여 정의가 상당히 훼손된 상태라도 사회 평화의 이름으로 기꺼이 견딜 수 있는 듯하다.

인간의 타고난 욕구는 유토피아와 전체주의적 전망-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종종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이다… 국민이 더 잘하지 못하면 정부가 그들을 내쫓고 새 국민을 뽑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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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깨문으로 시작해

이재명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위험한 광기의 시대에

여러분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

현실에 대응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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